<햇살마루> 왕십리의 푸른 밤
뜻밖에도 오래된 글 몇 편이 검색되었다. 부귀집을 욕하는 글도 있었고 부귀집을 추켜세우는 글도 있었다. 욕하는 글은 입구에서부터 풍겨 오는 무지막지한 누린내, 도대체 숨길 생각을 안 하는 다량의 조미료, 굶주린 죄인을 꾸짖는 난닝구 아저씨의 까칠함 등 근거가 분명한 데 반해 추켜세우는 글은 별 근거가 안 보였다. 한양대 90년대 학번으로 짐작되는 그들은 부귀집이 곧 사라지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나도 그랬다.
닭개장도 팔고 순댓국도 팔았지만 내게는 닭곰탕뿐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뚝배기, 고명처럼 얹은 양념장을 반쯤 덜어 내고 휘휘 저어 한 숟가락 입에 넣으면 그렇게 안심이 될 수가 없었다. 졸업하고 나서도 곧잘 들렀다. 맛은 한결같았다. 한결같은 조미료를 써서 그런 모양이었다.
2009년의 일이다. 오랜만에 국문과 후배를 만나 왕십리로 향했다. 둘 다 국밥 한 그릇씩 해치울 생각에 의기가 충천해 있었다. 우리는 한눈 안 팔고 똑바로 걸었다.
나는 황망하여 잠시 서 있었다. 내 표정을 살피던 후배가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부귀집의 행방을 탐문했다. 어디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간 게 아닐까 해서였다. 대부분 모른다고 했다. 조금 떨어진 다른 식당에서 마침내 대답을 들었다.
“그 집, 할머니 돌아가시고 좀 있다 장사 접었셔잉. 어딘가에 빌딩 사서 잘 지낸다고 하던데잉.”
후배는 내가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고 했다. 그 말은 사실이 아니며,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배가 너무 고파서가 아니었다. 닭곰탕 한 그릇을 꼭 해치우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한 시대가 가만히 드러눕는 소리 때문이었다.
나는 이십 대의 거의 전부를 그 언저리에서 보냈다. 대성식당에서 순두부찌개를 먹었고 한양뷔페에서 폐타이어 같은 순대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셨고 마기집에서 저작근이 붓도록 오돌뼈를 씹었으며 진사로에서 졸아든 부대찌개에 소주를 들이켰고 부귀집에서 닭곰탕을 해치웠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순 먹고 마신 기억밖에 없어 보이는데,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그랬다. 그 개떡 같은 음식들은 당시의 내 몸과 마음을 약탈하는 한편으로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지탱해 주었다. 나는 왕십리에서 그런 식으로 살아남았다. 그런데 대성식당을 필두로 내 이십 대의 증거들이 하나씩 사라지더니, 종내는 부귀집마저 떠난 것이다. 슬펐다기보다는 놀라웠다.
웹 페이지에서 부귀집이 영업하던 시절의 사진 몇 장을 발견했다. 주인 할머니의 얼굴도, 그 사위인 난닝구 아저씨의 뚱한 얼굴도 보였다. 너무 낯익은 장면이라 마음이 뜨거워졌다. 어쩌면 나는 사진이 붙들어 맨 바로 그 순간에도 후미진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었을지 모른다. 누린내 가득한 국밥에 코를 처박고서 불안과 외로움과 낙담과 또 뭐냐 아무튼 기타 도움이 안 되는 온갖 청승을 다 떨어 대며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었을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그날 부귀집을 에워싼 왕십리의 밤은 어쩐지 지금의 나로선 감당할 수도 없을 만큼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을 것 같다. 겪어 낸 시간은 어디론가 사라지는 대신 그렇게 켜를 이루어 눕는다.
[출처] 큰글씨 좋은생각
ⓒ 본 콘텐츠는 발행사에서 제공하였으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 재배포 등을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