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고 있는 이야기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럴 때 나는 책방 ‘페잇퍼’에 간다. 연희104고지 버스정류장에 내려 북적거리는 도롯가를 걷다가 골목에 들어서면 소음이 서서히 작아진다. 

연희동 골목만이 가진 특유의 격을 느끼게 하는 카페와 옷가게, 공방을 구경하며 걷다 보면 ‘Paperr’라는 간판이 나타난다. 바로 들어갈 수는 없다. 모바일로 가입 절차를 거친 후 비밀번호를 받아야 한다. 입회 절차를 거쳐야 들어갈 수 있는 까다로움은 오히려 이곳이 안전하다는 안도감을 준다. 

숫자 네 자리를 누르면 문이 열리고 눈앞에 또 다른 투명문이 나타난다. 그 문까지 통과하면 드디어 책방에 입성하게 되는데, 제일 먼저 시선을 빼앗는 건 고양이 두 마리다. 이 작고 완전한 세계의 주인이 우리라는 듯 당당하게 쳐다본다. 마침 재즈까지 흐르니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비밀스러운 개인 서재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든다. 

이 비밀책방의 주요 도서는 그림책과 만화책이다. 내가 가장 먼저 찾는 코너는 아다치 미츠루의 《H2》 전권이 있는 자리다. 나의 ‘최애’ 만화로 표지만 봐도 명대사가 떠오른다. 다른 책장으로 발을 옮긴다. 잊을 수 없는 정서적 흔적을 남기고 간 만화 《블루》와 《호텔 아프리카》가 보인다. 

다른 책방에도 80·90년대를 풍미했던 만화들이 있지만 마치 신간처럼 정갈하게 보관되고 배치된 곳은 흔하지 않다. 책에 대한 주인의 무한한 애정과 책을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손님들의 배려가 느껴진다. 청결하고 고풍스러운 실내장식, 깊이 있는 추천 멘트와 개성 있는 선곡, 이 모든 세심함이 합쳐져 이 공간은 ‘이야기에 대한 경외심’을 뿜어낸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날 아빠는 자녀가 수험생이 되어 처분할 거라며 상사가 가져온 만화책을 전부 집으로 실어 오셨다. 우리 삼남매는 그렇게 많은 양의 만화책을 처음 보았다. 동생들과 내 키를 훌쩍 넘는 양의 만화책 더미를 보는 아빠는 뿌듯해 보였다. 

청춘물 만화부터 19금 만화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얼마나 아끼는 것들이었는지 코딱지 하나 없이 모두 새 책처럼 깨끗했다. 여동생과 함께 쓰던 방은 일순간 만화방이 되었다. 나와 동생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만화책에 푹 빠져 지냈다. 평범했지만, 가장 뜨거운 심장을 닮은 나날이었고 처음 경험해보는 두근거림이었다. 이런 게 이야기의 세계란 말인가! 제발 다음 장에서 끝나질 않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한 장 한 장 넘겨봤다. 

그땐 몰랐다. 내가 그 세계에서 계속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바둥거리며 살아가게 될 거라는 걸. 비밀책방처럼 아늑한 페잇퍼에 오면 그때가 떠오른다. 처음으로 이야기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된 그 순간이. 

홀로 책방에 한참 박혀있다가 나오면, 어두워진 하늘 아래 퇴근 인파가 보인다. 일상을 반듯하게 쌓아가는 이들의 삶과 내가 혹시 멀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잠시 불안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감정은 곧 지나간다. 방금까지 온갖 이야기들로 샤워하고 나왔기에, 나에겐 잠시 잊고 있던 경외감이 돌아온다. 바로 거기가 도망친 나의 출구가 된다. 문득 돌아보니, 아빠는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가졌던 출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