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추위가 아직 가시지 않은 지난 3월, 광화문 앞 문화재 발굴 현장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경복궁 중건 시기에 조성된 넓은 기단 형식의 대(臺)인 월대(月臺)를 복원하는 현장이었는데, 조사 과정에서 1917년에 개설돼 1960년대까지 사용된 전차로를 확인한 것이다. 세종로 도로가 생기면서 묻혔던 전차로 아래엔 일제강점기에 매설된 콘크리트 배수로와 함께 19세기 월대뿐만 아니라, 17세기 조선 초기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층이 선연하게 남아있다. 우리의 발밑에는 과거가 있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복잡하게 얽힌 모습으로 현재와 공존한다. 

조선시대 임금이 거처하던 경복궁(景福宮)은 알고 보면 19세기 법궁이다. 초기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타 완전히 사라졌고, 왕조는 그나마 전각들이 남아있던 창덕궁에서 재건의 역사를 이어갔다. 무너진 석축과 기단만 남은 이곳은 이따금 왕의 행차만 이어졌을 뿐 오랫동안 빈터로 남았다. “선왕의 법궁이 황폐하여 이 지경이 되었구나!”라고 숙종이 한탄한 건 궁궐이 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관아 건물이 도열한 광화문 앞 육조거리의 위풍당당함을 더 이상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조 사후 흔들리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후계자들이 전각을 짓고 의례를 새롭게 했지만 그 누구도 경복궁을 중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경복궁의 중건은 1865년에 시작됐다. 고종이 왕위에 오른 이듬해였다. 열세 살의 왕을 대신해 대왕대비인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 중건의 기획자는 흥선대원군이었다. 법궁의 중건은 200년 넘게 버려져 숲이 무성해진 궁터를 정리하고 물길을 바로잡는 일에서부터 시작됐다. 경복궁은 초기 법궁보다 규모를 넓히고 전각의 수도 늘렸다. 신무문 북편엔 넓은 후원을 조성했다. 지금의 청와대가 자리한 곳이다. 

이 드넓은 곳에서 고종은 무엇을 했을까? 그 옛날처럼 근정전 앞에 붉은색 옷을 입은 무리와 푸른색 옷을 입은 무리를 나누어 교지를 내렸을까? 월대는 이때 등장한다. 초기 경복궁에는 없던 월대를 광화문 앞에 조성한 것은 궁궐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였다.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장소이자 왕이 광화문 밖으로 나와 백성들과 만난다는 상징성도 있었다. 중건된 경복궁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근정전도 사정전도 아닌 건청궁(乾淸宮)이다. 왕이 머물던 장안당(長安堂)과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坤寧閤)을 행각들로 엮어 하나의 영역으로 만든 이 전각은 후원에서 가까운 북편에 있다. 궁궐 남쪽의 거대한 전각들과 달리 왕의 거처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외진 곳에 소박한 모습으로 자리한다. 

한옥의 기품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이 아름다운 집에선 많은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다. 1887년에 조선에서 가장 먼저 전깃불을 밝혔다. 에디슨의 발명 이후 7년 만에 조선 한성에도 전깃불이 등장한 것이다. 1888년에 건청궁 뒤편에 궁궐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관문각(觀文閣)을 세웠다. 관문각을 지은 러시아 출신 사바친은 서양식 건물을 잇따라 세워 고종 치하에서 궁궐 양관 건축가로 역사에 남았다. 그는 관문각에 머물다가 명성황후의 시해를 목격하고 해외에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 낭인들이 왕비를 무참히 살해한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곤녕합 옥호루(玉壺樓)에서 발발했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러시아 대사관으로 거처를 옮겼고 다시는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 일제 치하에서 경복궁은 철저히 훼손됐다. 조선총독부가 세워지고 박람회와 미술전람회가 열리면서 전각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용도의 건물들이 들어섰다. 건물 대부분이 일본 세력가들의 마음대로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건청궁은 가장 먼저 사라진 전각이었다. 지금의 건청궁은 사적이 아니라 21세기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경복궁의 복원을 훼손된 역사의 회복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이질적인 역사의 흔적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궁궐에 남아있던 많은 건물이 사라졌다. 곧 사라져버릴 전차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역사는 깊고 삶은 복잡해서, 하나를 되살리면 다른 하나를 묻어버려야 한다. 경복궁을 거닐다 보면 왜 이 자리에 법궁을 세웠을지 금방 느낄 수 있다. 궁궐 어디에서나 보이는 북악산과 인왕산의 비경이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아름다운 자연이 든든하게 받쳐주는 이 땅에서 계절이 온화하게 흘러가듯, 왕가의 삶도 국민의 삶도 그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경복궁의 시작 아니었을까? 이 자리에 되살아나야 하는 건 그런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