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프랑스의 연극은 오늘날의 영화처럼 가장 인기 있는 대중 예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재미있는 연극을 관람하기 위해 먼 곳에서 여행을 오는 것도 불사했습니다. 특히 기차의 발달은 파리 근교 사람들만이 아니라 프랑스의 지방 사람들을 넘어 외국인들까지 파리로 모이게 했습니다.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1844~1923)는 당시 프랑스 연극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배우였습니다. 그녀는 다양한 장르의 다양한 배역을 맡았고, 그녀의 연기에 대한 진지한 태도는 ‘성녀 사라(Sarah Divine)’라는 호칭을 안겨 주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연극계의 아이돌이 된 그녀는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열렬한 팬 중 한 명이 프랑스에서 그림 공부를 한 체코인 화가 알폰스 무하(Alphonse Maria Mucha, 1860~1939)였습니다.

1895년 어느 날, 이름 없는 화가이자 가난한 디자이너였던 그는 프랑스의 한 포스터 공장에서 홀로 외로이 야근을 하던 중 갑작스럽게 연극 포스터 주문을 받게 됩니다. 연극의 제목은 <지스몽다 Gismonda>. 이는 빅토리앵 사르두(Victorien Sardou, 1831~1908)가 15세기 그리스 아테네를 배경으로 쓴 희곡으로, 무하가 너무나 사랑한 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주연을 맡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공장 직원들이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난 상태여서 무하는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이 포스터를 제작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포스터의 크기가 정형화되어 있었는데, 그는 그 틀을 깨고 기존의 포스터 2장을 세로로 이어 붙인 크기로 1장의 포스터를 만들었습니다.

이 포스터가 <지스몽다>로, 세로 길이만 2미터가 훌쩍 넘어갔습니다. 무하는 <지스몽다> 포스터에 그의 팬심을 가득 녹여냈습니다. 사라 베르나르가 원래 아름답기도 했지만, 그의 손을 거친 그녀는 여신 같은 외모를 지니게 됩니다. 그가 이렇게 긴 포스터를 만든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파리 전역에 붙은 이 포스터는 거리를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파격적이고 아름다웠습니다. 사람들은 이 포스터를 떼서 훔쳐 가기도 했고, 포스터를 붙이는 사람에게 뇌물을 주고 한 장 얻어내기도 했으며, 사라 베르나르의 모습만 오려내기도 했습니다.

그녀 역시 무하의 포스터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이 포스터는 마치 그리스 신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자신을 신비롭고 성스러운 이미지의 여신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라 베르나르는 무하를 자신의 전속 디자이너로 채용하게 되었고, 이후 그는 그녀의 전속 포스터 디자이너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무명의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였던 무하는 자신이 사랑하는 스타, 사라 베르나르를 등에 업고 자신도 일약 스타가 됩니다. 인기에 힘입은 그는 연극이 막을 내린 후 포스터를 4,000장 더 인쇄해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대량 인쇄된 포스터는 비교적 가격이 저렴해 가난한 이들도 그의 포스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지스몽다> 포스터 작업 이후 무하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고, 그에게는 여러 다양한 주문이 폭주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스타일과 콘셉트를 책으로 엮어 공식 자료집을 출판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이 책으로 더욱 유명해져 주문이 증가하는 역효과가 났다고 합니다. 성공은 성공을 낳았는데, 사라 베르나르 역시 연극 <지스몽다>를 통해 프랑스 연극계의 여왕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로로 긴 형태의 포스터 양식은 오직 사라 베르나르만을 위한 무하의 독특한 스타일이 됩니다. 그는 이러한 형태의 포스터를 그녀의 연극 외에는 그리지 않게 됩니다.

무하가 그린 그림 속의 사라 베르나르는 긴 포스터를 꽉 채우며 전신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오직 그녀만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포스터에서 그녀와 연극에 대한 정보 등의 글귀를 제외하면 남은 모든 여백은 오롯이 그녀를 위한 장식일 뿐입니다. 그가 만든 사라 베르나르의 포스터들은 자신의 뮤즈였던 그녀만을 위한 포스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하의 팬심이 느껴지는 대목이죠. 그 팬심 덕분에 그는 포스터뿐만 아니라 그녀가 연기하는 무대의 무대 장치와 의상까지 담당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성공한 팬이 된 거죠. 팬심으로 일궈낸 자신의 대성공입니다. 이처럼 무하에게 있어서 사라 베르나르는 단순한 스타 그 이상의 의미가 되어준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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