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3남 3녀 중 셋째였다. 어릴 적부터 샌드위치처럼 중간에 끼어서인지 누가 챙겨주길 바라는 것보다는 내 몫은 스스로 건사하는 독립성을 길러왔다. 중학생이 되자 여성이 밥하고 빨래하는 삶의 방식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고, 결혼해서도 직장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여성들은 결혼 후 직장을 갖고 싶어도 “결혼을 하면 그만두겠다”는 ‘결혼각서제’에 서명을 해야만 했다. ‘그래, 결혼해서도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자. 그렇다면 외국계 직장에 들어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붙잡았던 것이 바로 ‘영어회화’였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집 근처 미군 부대의 교회에서 극성스럽게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 내게 문제가 생긴 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대학진학에 대한 의사를 비쳤을 때였다. 지극히 봉건적이셨던 아버지의 반대로 1차 시험은 보지도 못하고 몰래 2차 시험을 봤다. 대학합격통지서를 보여드리며 첫 등록금만이라도 보태달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마치 92년도에 흥행했던 MBC드라마 <아들과 딸>의 김희애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던지 어머니는 건넛방으로 나를 불러 결혼반지를 빼주셨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첫 등록금을 마련했고, 이후 대학 4년 내내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면서 어렵게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준비해온 영어회화 덕분에 영국계 은행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은행에서의 내 일과는 수동 타자기로 타이핑하는 것이 전부였다. 퇴근 후 틈틈이 시간을 내서 테렉스오퍼레이터 자격증도 따고 영어 속기도 배우며 이직을 시도했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미국계 은행에서 경력 행원을 뽑는다는 소식에 이력서를 제출했고, 이전보다 두 배의 월급을 받고 비서로서의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다시 미국계 은행에 입사한지 2년 후 어느 날, 상사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비서 일 그만두고 외환딜러가 되면 어떻겠소?” 당시 내 나이 서른 두 살이었다. 순간 십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해 봤다. ‘앞으로도 비서로서 후배들을 제치고 계속 인정받을 수 있을까?’ 또한 영어와 속기를 할 줄 아는 외국계 회사의 비서 월급이 은행 과장보다도 많던 시절이라 직업을 바꾸는 건 굉장한 모험이었다. 하지만 기회가 왔을 때 저질러보자는 생각으로 제안을 받아들이고 외한딜러가 되었다. 1992년 3월, 조선일보 월요경제란에는 <연봉 수억 원, 외환딜러 ‘1세대’>라는 타이틀과 함께 내 이야기가 실린 기사가 게재되기도 했다.
1995년 마흔 아홉이 되던 해, 외국계 금융권에서의 실무를 후배들에게 교육시키고자 ‘한국국제금융연수원’을 설립했다. 그동안 어렵게 익힌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하기 위해서였다. 2004년에는 영국은행협회와 파트너십 형태로 협약을 맺으면서 국제공인신용장전문가(CDCS), 국제공인보증서전문가(CSDG), 국제공인무역전문가(CITF) 등 120개국에서 통용되는 국제자격증을 국내에 도입했는데, 이는 은행권의 실무자들이나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학생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리고 2003년 1월, ‘여성금융인네트워크’라는 이름의 단체를 설립했다. 그리고 매분기마다 금융권의 CEO를 초청하여 여성관리자급을 늘려 달라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당시만 해도 지점장 등 높은 직급에서 일하는 여성이 드물었고, 금융권에서의 여성들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때문에 여성들도 단단한 유리천장을 뚫고 높은 직급에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1980년, 외환딜러로 발탁된 시절만 해도 금융권에서 나는 ‘돌연변이’와 같은 존재였다. 그로부터 36여 년이 지난 지금의 금융계는 첫 여성 행장이 탄생되는 등 일부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여성인력에 대한 차별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
이러한 문제점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고 토론하고자 2015년에는 ‘미래와 여성’이라는 주제로 한·중·일 국제 콘퍼런스를 개최했고, 각국 금융권의 여성현황과 문제점을 발표할 기회를 마련했다. 2016년에는 “여성이 경제를 살린다”는 주제로 국제행사를 진행하면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금융권 여성인재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발전시키고 있는 기관장에게 시상도 하였다.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더 많은 기회와 권한을 주면 역차별을 받을 거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하지만 여성을 돕는 남성이 늘어나고, 남성과 여성이 동반성장을 한다면 우리사회는 더욱 투명하고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90%를 차지했던 수렵채집시대처럼 여성과 남성이 함께 일하고, 공감하며 충분히 대화와 의견을 나눈다면, 지난 수천 년간 남성이 지배해온 세상보다 결점이 줄어드는 사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