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23년이다. 1995년 공중보건의로 소록도에 첫 발을 내딛고 세월의 발자국을 남겨온 시간이. 누군가는 그를 ‘소록도의 슈바이처’라고 부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장기려 박사와 같은 ‘바보 의사’라고도 한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는 “어이! 오 선생!”하며 격의 없이 다가오는 한마디면 충분하다. 소록도(小鹿島), 한자를 그대로 풀면 ‘작은 사슴 섬’이 되는, 적막이 고요를 뒤덮은 이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그는 국립소록도병원 오동찬 의료부장(48)이다. 한센병 후유증을 앓던 환자들을 위해 독학으로 ‘아랫입술 재건 수술법’을 국내 최초로 개발한 그는 그저 남을 도울 수 있는 손과 발이 있음에 감사하다고 했다.
“남이 아픈 것을 보면 그냥 마음이 아파요. TV에서 언청이를 출산한 산모를 본 적이 있는데, 화면으로 그분의 아픔이 느껴졌어요.보통 장애를 갖고 태어나거나 이상이 있으면 엄마 탓을 하잖아요. 그래서 치과대학에서 구강외과를 선택했죠. 처음에는 언청이가 많은 동남아나 중국 연변 쪽으로 의료봉사를 가려고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 지원하려고 했는데, 그해에 치과의사를 안 뽑더라고요. 발길을 돌려 소록도로 왔으니 제겐 운명인 거죠(웃음).”
그렇게 소록도에 뿌리를 내리고 꽃도 피우며 삶의 정원을 가꿔왔다. 부모님께 딱 1년만 다녀오겠다고 한 말은 결국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됐지만. 당시 간암 말기였던 어머니는 그가 섬으로 떠난 지 1년 만에 눈을 감으셨고, 그 곁을 지키지 못했던 그는 그날을 회상하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남들은 저를 좋은 의사, 좋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나쁜 아들, 나쁜 남편, 나쁜 아빠일 뿐이에요. 현실적인 유혹이나 사회적인 편안함을 모두 뿌리치고 저로 인해 가족들이 희생하고 있으니 늘 미안하죠. 제겐 제 길을 쭉 가는데 있어서 아무리 옆에서 어떤 말을 해도 매몰차게 막아버리는 성질이 있어요. 좋게 말하면 추진력이고 강단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거죠.”
그는 그동안 걸어온 길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3회 대한민국 공무원상’ 대통령 표창, ‘제2회 성천상’ 등을 수상했다. 그리고 그 길 위에는 오로지 한곳을 가리키며 동행한 그의 가족들이 서 있었다. 홀로 우뚝 솟은 삶의 목표도, 혼자서만 빛나는 별도 없다고 생각해온 그는 최근에도 성천상으로 받은 상금 1억 원 전액을 기부했다. 뿐만 아니라 매달 50만 원씩 저축해서 1년에 600만 원이 모이면 가족 모두가 해외로 의료봉사를 나가고 있다. 의사로서의 소명의식과 인술(仁術)은 타인의 삶을 바꾸고 자신의 행복으로까지 점염되었다. 
“의사는 제가 행복하고 희열을 느끼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아랫입술이 쳐진 사람을 7시간 수술해서 침도 안 흘리고 밥도 흘리지 않게 고쳐주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데요. 세상에는 잘 드러나지 않고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훌륭한 의사들이 많아요. 다른 공무원들도 정년까지 한 조직에 몸을 담고, 일반 직장인들도 성실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데, 저는 소록도에서 20년 이상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상을 받잖아요. ‘내가 받을 자격이 되나?’하고 부끄러울 때가 많죠. 그래서 너무 큰 상금은 제 돈이 아니라는 생각에 남을 돕는 데 쓰고 있어요(웃음).” 
이러한 완고함은 혼자만의 뜻이 아니다. 아내와 두 딸의 동의와 승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신들은 하루 세끼 밥도 잘 먹고, 눈비를 피할 관사도 있고, 공무원 연금도 나오기 때문에 넘치진 않아도 충분하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더 이상 바라는 건 욕심이라는 그와 그의 가족들은 어느새 서로를 닮은 삶의 무늬를 가슴에 담고 있었다. 
“저는 아직 좋은 사람은 아닌가 봐요. 가족회의 끝에 상금을 송금하려는데 은근히 손이 벌벌 떨리더라고요. 애써 아닌 척 했지만 순간 망설인 거죠(웃음). 그런데 욕심을 부릴수록 소록도 주민들에게 미안해져요. 우린 가족들과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여행도 다니고, 자녀들 학교도 보낼 수 있었잖아요. 누구나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여유가 생기면 주위도 둘러보고 봉사도 하면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공유했으면 좋겠어요.”
주민들에 대한 미안함은 이 섬의, 그리고 한센인들의 태생적인 아픔에서 기인한다.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 서정주 시인의 <문둥이>와 같은 문학작품들에서도 평범한 일상에서 배제된 혹은 격리된 그들의 고단한 삶을 변주하고 있지 않나. 세월에 세월이 포개지고 하나의 길이 또 하나의 길을 내면서 소록도를 에워싸고 있는 담은 시간에 깎이고 바람에 쓸려 조금씩 낮아졌다. 하지만 그곳과의 거리는, 그리고 한센인에 대한 인식의 문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저도 잘난 것 없이 이분들과 같은 사람인데, 과거에 이 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 게 그냥 아프잖아요. 지금은 의식주와 진료까지 정부지원을 받아서 경제적·육체적인 삶은 눈에 띄게 호전됐어요. 하지만 정신적인 풍요도 중요한데 여전히 차별에 노출되어 있죠. 한 번씩 뭍에 나가서 함께 식사를 하면 좋지 않은 시선과 꺼려하는 분위기를 느껴요. 이분들도 완치됐으니 당당해도 되는데, 과거로부터 쌓인 것들이 많아서 위축되시는 것 같아요.” 
그의 아내(46)는 그보다 몇 해 앞서 소록도에 온 간호사였다. 결혼할 당시 주민들은 축의금으로 백 원, 오백 원, 천 원, 오천 원, 십시일반 쌈짓돈을 모아서 그들에게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그는 ‘결혼해서 이 간호사 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라는 애정어린 협박(?)도 받았다며 그날의 온기를 고스란히 떠올렸다. 
“한번은 결혼 전에 조○○ 할머니가 찾아오셨어요. 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시더니 ‘이거 삼만 원인디 경대랑 요강도 사고 장롱, 이불도 사서 잘 살아. 알겄지?’ 하시는데, 순간 찡하더라고요. 그분은 세상물정을 잘 모르셔서 삼만 원이 엄청 큰돈이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큰 딸이 대학에 떨어졌을 때도 주민 모두가 함께 슬퍼했어요. 지난주에는 연이어 네 분이 돌아가셨는데, 마음이 아리고 가슴이 먹먹하네요.”
‘행복’과 ‘잘 사는 것’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인생의 절반을 섬 사나이로, 소록도 주민으로 살아오면서 그는 스스로 행복의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양푼비빔밥을 먹으며 얼굴에 묻은 밥풀을 떼어주고, 누가 더 많이 먹었냐며 다투면서도 다시 웃는 소소함. 아직도 8년 된 낡은 3G 폴더폰이 불편하지 않고, 신혼 때 구입한 냉장고도 그대로, 이비인후과 원장님이 병원을 떠나면서 안쓰러운 마음에 주고 가신 TV에 만족하는 삶. 오 선생 덕분에 뭍에 나가서 처음으로 밥도 먹어보고 고맙다는 주민의 말에 오히려 감사해하는 겸허함. 그가 구상한 행복의 그림은 특별한 재료도 기법도 없는 평범한 일상 그대로였다. 
“돈이 행복의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에요.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만족도가 다르니까요. 제 동기들이나 다른 의사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있는 거예요. 대학에 강의를 가면 저 같이 살지 말라고 해요. 대신 개업해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가족들 호강시켜주라고 하죠. 모든 의사들이 저처럼 살면 어떻게 되겠어요? 솔직히 자식들은 편하게 살기를 바라지만 보고 배운 게 이것뿐이라 아빠와 같은 길을 간다고 하니 걱정되긴 해요. 물론 아이들 나름대로의 삶과 주관이 있어서 강요할 순 없죠. 다만 돈 많이 버는 의사가 되고 싶대요. 그래야 더 많이 봉사할 수 있으니까요(웃음).” 
치과의사가 아니었다면 선생님을 했을 거라는 그는 누군가에게 쓰임이 되는 삶을 꿈꿔왔다. 내 자신만큼 옆 사람도 소중하다는 지극히 평범한 상식이 통하는 세상, 타인과의 비교로 상대적 박탈감에 좌절하지 않고 가끔은 자신만의 별자리를 바라보며 길을 잃지 않는 자세, 그리고 진심으로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법을 가르쳐주는 인생의 스승 말이다. 
“우리는 나 자신을 거울로만 볼 수 있는데, 그건 단면이고 정지화면일 뿐이에요. 하지만 타인은 다각적·입체적으로 나를 볼 수 있죠. 각자에게는 거울에 비친 한 면만 있는 게 아니라 재능과 빛도, 단점과 어둠도 있잖아요. 거울에서 벗어나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면 자신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깨달을 수 있을 거예요.” 
그의 말대로 요즘은 눈이 맑은 사람들도 찾아보기 힘들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잃거나 잊어버리기도 하는 시대이다. 그럴수록 마음까지 치료해주고 싶다는, 여전히 청년 같은 의사 오동찬. 오늘도 그는 주민들에게, 주민들은 그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있다. 
“당장의 꿈은 가족들이 인정해주는 의사가 되는 거예요(웃음). 정년 후에는 해외에서 빈민들, 한센인들을 위해 의료봉사를 하며 살려고요. 아내는 미용기술을 배워서 미용봉사를 하고, 딸들은 소아과 진료를, 저는 치과 진료를 하는 것이 이루고 싶은 꿈이에요(웃음).”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목에는 낙조(落照)로 물든 꽃들이 흐드러져 있었다. 삶을 관조하며 깊고 넓게 드리워진 석양은 어쩐지 아름다워서 슬픈 소록도를 닮았다. 


글/사진=김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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