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회로들이 열리고 온몸의 근육들이 긴장하는 순간, 세계 정상의 스포츠클라이밍 선수 김자인(28)은 한 마리 나비처럼 날아오른다. 153cm의 아담한 체구, 205mm의 암벽화에 숨겨진 열정은 휘어진 손가락 마디, 닳고 닳은 지문들, 굽은 발등을 타고 우아한 춤사위로 피어난다. 일등보다는 완등을, 결과보다는 과정을 즐기는 그녀가 ‘암벽여제’, ‘암벽 위 발레리나’로 불리는 이유이다.
오늘도 암벽이 던진 질문에 묵묵히 자신만의 홀드(손잡이)로 대답하는 작은 거인 김자인. 그 도전의 궤적을 좇기 위해 서울 신사동에 위치한 더자스(The Jas) 암장에서 그녀를 만나보았다. 화면보다 더 가녀린 외모와 앳된 말투, 그것을 뚫고 전해진 강렬한 에너지와 클라이밍에 대한 믿음은 한겨울 바위를 닮았다.

클라이밍과의 인연은 그녀의 이름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일(Seil, 독어로, ‘등산용 밧줄’)의 ‘자’와 북한산 인수봉의 ‘인’이 합쳐져 ‘자인’이 된 것. 산악인인 부모님(어머니는 클라이밍 1급 공인 심판), 암벽등반선수인 두 오빠들은 인연의 테두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큰 오빠(김자하)는 10년간 코치를 전담해 왔고, 국가대표 선수인 작은 오빠(김자비)는 암장에서 그녀와 함께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특히 작년 12월, 이 클라이머 가족의 대열에 합류한 산악구조대 출신의 소방공무원인 남편도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고 있다.  
“먼저 클라이밍을 시작한 오빠들을 따라서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수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때는 예체능 쪽에 관심이 많아서 합창단 활동도 했고, 성악가를 꿈꾸기도 했죠. 지금은 잘 못하지만요(웃음). 사실 처음에는 재미보다 잘하고 싶은 욕심이 더 컸어요. 어릴 때부터 ‘하려고 하는 것은 완벽하게 하자’는 승부욕이 있었거든요. 지금은 클라이밍 자체가 즐겁고, 이만큼 재미있는 것을 찾지 못했죠.”
그래서일까. 높이 15m의 직벽에 매달려 홀로 자신과의 싸움을 하면서도 그녀는 늘 환한 미소로 암장을 밝힌다. 보이는 곳에서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격려하고 응원해주는 고마운 인연들이 밧줄처럼 그녀를 지탱해주고 있기 때문에.   
“용기를 주시는 분들도 많아졌고, 운동 환경이나 인지도도 좋아졌어요. 자립 가능한 선수층도 두터워졌고요. 감사히도 선수로서 대회에서 이루고자 한 것은 모두 달성했어요. 이런 긍정적인 상황에서 성적 1등인 선수도 좋지만 그것보다 사람들이 제 등반을 보고 클라이밍은 참 멋진 운동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고 싶어요.”
세계무대에서 그녀가 펼친 날갯짓은 비인기 종목이던 스포츠클라이밍의 대중화에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생활스포츠로 각광받으며 곳곳에 암장이 생겨났고, 그녀 역시 사람들의 관심과 인기라는 자장 안에서 새로운 텍스트가 되었다. 그러나 외연이 확장되면서 슬럼프가 찾아왔다. 2011년 김연아 선수가 소속된 올댓스포츠와 계약하고 소위 스타선수로서의 행보를 이어가면서부터이다. 클라이밍을 즐기고 열심히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어느 순간 대회 성적만으로 판단되고 평가되는 현실의 온도차를 체감하게 된 것. 
“그때는 너무 어렸고, 처음이라 모든 게 낯설었어요.
대회 나가기가 두려울 정도였죠. 17년 간 선수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1등을 목표로 참가한 적은 없었거든요. 일등보다는 완등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러던 중 우연히 2012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장미란 선수를 보고 힘을 얻었죠. 경기를 마친 후, 바벨을 어루만지며 웃는 모습이 정말 찡하더라고요. 그동안 엄청난 기대와 관심 속에서 얼마나 부담이 컸겠어요? 그 장면을 보고 생각했죠. ‘아, 내가 클라이밍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열심히 했다면 성적에서 만큼은 부끄러워 말자’라고요.”
그렇게 깎이고 씻기며 다져진 시간, 인생이라는 거대한 암벽에서 그녀가 만든 홀드는 완등을 향한 끊임없는 열정,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었다. 단신이라는 약점을 유연성이라는 장점으로 살려내며 리드(lead)1)와 볼더링(bouldering)2)을 동시에 석권한 세계 최초의 여자선수가 됐고, 2014년 세계선수권 대회 우승, 세계 랭킹 1위에도 당당히 올랐으니 말이다. “한번 할 거면 제대로 하자”는 집요함은 고려대 재학시절 성실한 학업태도에서도 드러난다. 빽빽한 경기일정과 수업을 병행하며 모범적인 선수이자 학생으로 화제가 됐을 정도. 최근에는 지도자를 목표로 대학원 공부를 마치면서 또 다른 도전을 완성해 나가고 있다.   
“얼마 전, 석사 논문을 끝냈는데 생각보다 힘들었어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만일 지도자가 된다면 선수들을 체계적으로 훈련시키는 시스템을 연구해보고 싶어요. 물론 더 공부하고 준비해야죠. 요즘에는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커요. ‘열심히’와 ‘즐거움’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거죠.”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누구나 아는 이 말처럼 그녀의 성공은 ‘즐거움’과 ‘열심히’의 긴장관계에서 배태된다. 이 건강한 관계가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 이어지길 바라며 올림픽에 대한 기대감을 물었다. 스포츠클라이밍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지만, 현역 선수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무대에 대한 솔직한 심정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뜻밖의 기회이자 새로운 도전 앞에서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진심을 건넸다.
“4년 뒤엔 33살, 결코 적지 않은 나이지만 해오던 대로 즐겁게 준비하고 싶어요.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클라이밍을 왜 하는지 되새기면서요. 제가 여전히 오르는 건 몰입의 순간 때문이에요. 뭐랄까, 매달려있을 때의 특별한 느낌인데, 암벽의 일부가 되는 경지라고 할까요? 클라이밍에는 수만 가지의 가능성도 있죠. 그저 오르는 게 아니라 코스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너무 신나요. 홀드가 어떻게 위치하고, 그것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문제들이 달라지니 절대 지루하지 않죠.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자연바위 등반도 하려고 해요.”
흘러온 대로 자연스럽게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끝까지 클라이밍을 놓지 않겠다는 암벽여제 김자인. 늘 정상에서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그녀이지만 어쩐지 ‘여제’라는 말은 불편하고 어색하단다. 그저 ‘암벽 위 발레리나’로도 충분하다며 수줍게 웃는다. 여제라는 말은 최고라는 자리에 의해 규정되지만 후자는 등반 스타일을 보고 붙여졌기 때문.
이처럼 악력과 마찰력을 뛰어넘는 집념으로 삶의 조각들을 새기고 있는 그녀에게 있어서 클라이밍은 인생의 느낌표이자 마침표였다. 수없이 떨어져도 오르고 또 오르는 생(生)에 대한 의지로서.

 

각주)-----------------
1) 높이 15m 직벽에 설치된 홀더 40~60개를 8분 안에 오르는 종목.
2) 로프 없이 맨몸으로 5m 정도의 직벽을 오르는 종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