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발자국

꽃, 노동과 해방의 글쓰기

김은아, 칼럼니스트·플로리스트 

“제목에 속았어. 가벼운 내용인 줄 알았다고.”

출간한 책을 읽고 지인이 한마디 했다. 

“그래? 그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든 순간에 꽃은 피듯이>, 뻐근한 육체노동의 삶을 고운 제목에 담아서 그런가 보다. 입술만 달싹일 뿐 그럴싸한 설명을 덧붙이진 못했다. 그와 헤어진 저녁, 상념에 젖어 동네 골목을 슬렁슬렁 걸었다. 신장개업한 통닭집을 지나치는데, 고소고소하고 매콤한 튀김 냄새가 가게 앞을 기웃거리게 했다. 입구 매대에 늘어선 닭의 몸통이 바삭바삭한 구릿빛 껍질을 뽐낸 채 열 맞춰 누워있었다. 

책 제목은 치킨집 냄새 같아야 하는 거 아닌가. 글의 정서를 솔솔 풍기면서 가게 문 열듯 책장을 열어 글 속으로 들어가고 싶게 해야 하니까. 간판을 보니 ‘또와 치킨’이었다. 책 제목은 가게로 치자면 간판과 같아서 시선을 끌어야 하는데, 안달이 나서 손에 쥐고 싶게 해야 하는데 왜 흔한 풍경 같은 이름을 지었을까. 

모든 순간, 꽃. 십여 년간 꽃 더미 속에서 목장갑 끼고 가위 쥐고 노동한 이가 지은 제목의 어구다. 몸에 밴 삶은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기 마련인가 보다. 모든 순간에 꽃이 있긴 있었으므로. 사다리에 올라타 팔을 뻗치며 천장에 꽃을 주렁주렁 매달던 어느 날이었다. 

“어머나, 너무 예쁘다.” 

호텔 연회장에는 하객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꽃향기를 맡았다. 그런가? 하며 킁킁거리지만 시큰한 어깨 위로 톡 쏘는 파스 냄새만 올라올 때, 삶은 조금씩 향기를 잃어갔다. 결혼식이 끝나면 꽃과 드잡이라도 하듯 장식을 폐기하고 기물을 나르고 청소하느라 허리가 쑤셨다.

“앗, 꽃아 미안해. 나 때문에 죽었어.” 

모가지가 댕강 부러진 국화를 보고 눈이 그렁그렁한 아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꽃을 한 무더기 뽑아내어 쓰레기봉투에 쑤셔 넣던 나는 난감했다. 행복한 재잘거림, 슬픔의 기류에 감응하지 못한 채 십 년이 흐르자, 물기 없는 꽃잎처럼 삶이 메말라갔다. 작은 입김에 바스락 갈라지고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여기 김 실장은 영국 출신 유학파야.”

누군가 그럴싸한 수식어로 나를 성공한 전문직 여성처럼 치장하면, 땀으로 젖은 얼굴에 손이 갔다. 화려한 수식어는 궁색한 삶을 가리긴 하지만, 피부에 흡수되지 못해 겉도는 과한 화장처럼 불편한 괴리감을 낳았다. 삼십 대 내내 최저 시급을 벗어나질 못했다. 뼈마디는 굵어지고 말투는 괄괄해지는데 ‘꽃 속에 파묻힌 향기로운 삶이에요’라고 삶을 미화할 수는 없었다. 

삶의 줄기가 꺾이고 몸이 상하고 문드러진 일상. 쓸모없는 꽃이 되어가던 삶은 글 속에서 새롭게 피어난다. <엘르>지의 편집장 장 도미니끄 보비(Jean-Dominique Bauby)는 뇌출혈로 쓰러져 전신의 신체적 자유를 잃는다. 몸을 옥죄는 잠수종에 갇힌 삶을 살지만,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왼쪽 눈의 깜빡거림으로 <잠수종과 나비>를 집필하면서 정신은 나비처럼 나들잇길에 나섰다. 

평화시장 재단사, 열여덟의 전태일은 노동 현실의 참상을 글로 풀어내면서 착취된 삶에 존엄을 부여했다. 글, 삶의 중력에서 벗어나 존재가 닿을 수 있는 범위를 한정 짓지 않는 세계. 글쓰기는 해방이며 우주 탐험과 같다. 책상에 앉아 의식의 등을 환하게 켜면 모험은 시작된다. 달의 표면만큼 넓은 모니터 위로 삶에 대한 사유와 질문이 둥둥 떠다닌다. 그러다 단어의 발자국이 찍히면서 문장은 자아 탐구의 길을 연다. 

꽃 일을 그만두고 시작된 글쓰기 여행.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듯, 자기 연민과 한탄의 늪에서 빠져나와 삶을 조망할 수 있었다. 인생을 보는 눈이 너그러워졌다. 목표를 향해 쏘아대는 불꽃이 아니라 은은하게 퍼지는 이른 봄의 햇빛. <모든 순간에 꽃은 피듯이>는 그런 시선의 제목이었다. 쓸쓸하고 씁쓸한 삶의 그늘을 매만지는 한줄기 햇살 같은. 좌절과 슬픔에 삶이 비틀거리는 순간마다 문장은 한여름의 맨드라미처럼 자라났다. 곧게, 선명하게.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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