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Road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서준희, 사진작가

커피향 가득한 숙소 식당에서 만난 루치에는 그곳의 파트타임 직원이었다. 브르노대학의 의대생이기도 한 루치에는 아침 식사 때마다 식탁 맞은편에 앉아 조잘조잘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때로는 또 다른 직원인 마리도 우리의 즐거운 대화에 동참했다. 체코의 시골 마을인 텔치의 아침은 여자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행복한 기억으로 반짝이고 있다.

텔치 버스 터미널에서의 첫 만남 이후, 저녁마다 함께 식사를 했던 호주인 폴레인 여사. 완벽주의자였던 그녀는 식사 전에 늘 식당 답사를 하는지라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덕분에 편하고도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빛 좋은 날, 마을 산책을 함께 하며 키 낮은 나무에 달린 이름 모를 과일을 따서 맛보던 순간은 여자들의 우정에 관한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인 듯했다. 프라하에서 재회한 그녀와의 저녁 식사는 오랜 친구와 마주한 밥상처럼 너무 편안했다. 호주에서만큼은 숙소를 구하느라 애쓰지 말고 그녀의 집에서 지내라는 따뜻한 제의도 잊히지 않는다. 그녀는 현재 정년퇴직을 하고 여전히 혼자 여행 중이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 후 살던 집을 처분하고 19개월간 홀로 여행 중이던 호주인 니콜. 여리고 소심한 그녀는 룩셈부르크 유스 호스텔의 룸메이트였다. 집도, 미래에 대한 꿈도 없었던 그녀였지만 여행 후, 대학의 호텔 경영학과에 진학해 만학도의 길을 걷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프라하의 올드타운 광장 근처에 가면 생각나는 프라하 카렐대 학생 알렉스. 300년 전에는 궁전이었다는 그의 아파트는 위치가 좋아 꽤 오래 머물렀다. 그곳에 기거하며 숙소 관리직을 겸했던 그는 러시아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숙소를 떠나던 날, 그가 포장이 된 즈느이모 산 화이트와인 한 병을 수줍게 내밀었다. 화이트 와인을 좋아한다는 나를 위해 아침부터 마트에 가서 선물을 골랐을 그의 예쁜 마음이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폴란드 바르샤바행 기차에서 만나 긴 기차 여행을 함께 한 안나 수녀님. 편찮으신 어머니를 만나려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 장시간 기차로 이동 중이었지만, 작은 손가방에는 끼니를 대신할 밍밍한 과자 한 봉지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내게 나누던 그녀는 가난하지만 아이처럼 맑고 밝았다. 숙소에서 만들어간 1인분의 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그녀의 낡은 이어폰을 한 개씩 귀에 꽂고 성가를 따라 부르던 시간은 잊지 못할 것이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던 그날의 초록 풍경은 유난히 더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왜 그녀와는 연락처를 교환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톨릭교회들을 다 뒤져볼까….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트램에서 만난 17세의 아프가니스탄 출신 사샤는 고국에서 부모님을 잃고 스트라스부르의 삼촌댁에서 2년째 거주 중이라고 했다. 그는 전학 온 프랑스의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던 일, 교내 하키 선수가 되어 점차 안정을 찾고 있다는 등 처음 만난 내게 서투른 영어로 많은 얘기를 들려줬다. 그런 아이에게 당장 해줄 것이 없는 내 상황이 참으로 속상했다. 사샤와 헤어지고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아팠던 마음은 지금도 그때의 크기 그대로 남아있다.

새벽 2시에 도착한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 호스텔 문이 열리지 않아 난감해하던 중 홀연히 나타나 따뜻한 말로 문을 열어주고 사라진 백발의 할머니는 너무나 생생히 기억난다. 젊은 슬로베니아 사람도 잘 못하는 영어를 또박또박 얼마나 잘 하시던지. 나는 지금까지도 그녀를 착한 유령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스페인 톨레도의 골목길에서 독서 중이다가 얼떨결에 사진 모델을 해주신 할아버지도,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강아지들 얘기로 만나자마자 눈물 콧물 다 흘린 독일 뮌헨의 나탈리도, 식전부터 세수도 안 한 얼굴로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해준 리투아니아 빌뉴스의 프로 모델 제드도, 트램과 기차와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도, 아… 내 배낭 속을 마구 휘젓고 간 프랑스 콜마르의 나쁜 소매치기마저도, 이제는 다 그리운 장소의 그리운 사람들이 되었다. 

풍경 속에 사람이 있으면 좀 더 재미있는 사진이 되듯 여행도 마찬가지다. 여행 속에 사람이 있으면 추억의 공간들이 훨씬 더 많이 생긴다. 가끔 여행지에 대해 생각하노라면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먼저 떠오른다. 사진을 찍기 위해 시작했던 ‘일’ 같았던 여행이 이제는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진정 설레는 여행이 되었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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