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읽다] 내 인생의 필름 한 조각 / 최재훈, 영화평론가

늘 무언가를 결심하지만, 사느라 부대끼다 흐지부지되어버리는 우리의 삶에 새해가 있다는 건 어떤 점에서는 일종의 축복 같다. 놓아버린 결심을 다시 꽁꽁 싸매보는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은 기분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새해의 첫날, 어떤 결심을 해볼까? 내 삶을 조금 더 물기 있게 만들어 줄 여행을 결심해도 좋고, 어제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보리라는 바람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라이프 매거진의 필름 현상 팀에서 16년째 일하고 있는 월터 미티(벤 스틸러)는 42세 생일을 맞이한 날, 출간 잡지 폐간으로 대규모 구조조정이 된다는 소식을 듣는다. 전설적인 사진작가 숀 오코넬(숀 펜)은 필름 한 통을 보내 25번째 사진을 표지 사진으로 써 달라는 전보를 보낸다. 하지만 25번째 필름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고 월터는 필름을 찾기 위해 그린란드로 떠난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2013)의 주인공 월터는 소심하고 평범한 남자다.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의 프로필 란에 ‘가 본 곳’과 ‘해 본 일’을 비워둔, 특별하게 방문한 곳도, 해 본 일도 없는 따분한 삶을 살아왔다. 벤 스틸러 감독은 아주 꿈이 많았던 월터의 어린 시절을 되짚으며 몽상가가 된 그의 현실과 겹쳐 보여준다. 그는 어린 시절 갑자기 아버지가 죽고, 소중했던 꿈을 접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을 시작했다. 따분한 일상을 상상으로 극복해 온 월터의 삶은 현실의 벽 앞에서 꿈을 접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다.

현실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지만 상상 속에서 월터는 시간과 공간, 한계와 경계를 뛰어넘는 멋진 사람이다. 그런 월터가 상상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진짜 여행을 시작된 순간 관객들은 짜릿한 대리만족의 경험을 하게 된다. 늘 한결같기만 한 일상에 상상이 아닌, 진짜 모험이 찾아오는 순간이 생생한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연 배우이자 감독인 벤 스틸러는 월터 미티라는 평범한 남자의 모험담이자 성장기인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통해서 ‘무엇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지’ 따뜻한 온도로 묻는다. 소시민의 소소한 삶이 중심에 있지만, 상상의 영역을 자유자재로 그려내는 영화의 특성상 이 작품은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를 보는 듯한 즐거움을 준다. 아이슬란드의 풍광과 히말라야산맥의 웅장함이 마음을 흔들고, 뉴욕 도심의 결투와 화산 폭발의 스펙터클은 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준다.

아주 어린 시절, 밤에 불을 끄니 별이라는 전등이 켜지는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어린 시절에는 뜬구름을 양떼처럼 보았다. 등 뒤로 기다랗게 드리운 그림자 하나만 있어도 반나절은 놀 수 있었던 그런 상상력으로 가득한 어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새 우리는 꿈을 꾸는 어른을 몽상가라 부르고, 그들을 괴짜라 여기는 어른이 되었다.

영화 속에서 월터가 현실 대신 공상으로 뛰어들기 위해 멍 때리는 순간, 흘러나오는 노래는 데이비드 보위의 , 즉 우주의 괴짜라는 노래다. 하지만 두 번째 가 흘러나올 때 월터는 완전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다. 월터의 성장을 지켜본 관객들은 두 번째 이 노래가 영상 위로 흐를 때,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퇴출될 위기에 놓였지만 영화 속 월터의 직업은 필름을 현상하는 일이다. 필름을 현상하는 것은 잡지를 만들기 위한 가장 기초가 되는 작업이다. 영화는 가장 근본이 되는 일을, 가장 성실하게 해내는 월터를 되돌아보면서 그의 삶을 칭찬하고, 또 격려한다. 월터를 모험으로 이끄는 사라진 25번째 필름은 마치 ‘파랑새’ 동화의 은유 같다. 2023년,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내 인생에서 아직 현상하지 않은 조각 필름을 찾아보는 몽글몽글한 시간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