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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 키트   

강윤선, 도예가·前 승무원      

평생 다시 돌아올 수 없다면 가방에 무엇을 챙겨가야 할까? 나는 이제 곧 이스탄불로 가족과 이사를 하게 되었다. 거대한 살림들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2008년 홍콩항공에서 승무원으로 근무했을 때의 서바이벌 키트가 생각이 났다. 비행의 시작은 가방 싸기다. 여행의 베테랑은 일상의 축소판을 가방에 압축해 옮긴다. 먼 나라를 며칠간 다녀올 때 필요한 최소한의 짐을 넣는다. 전 세계 어디나 들고 다니는 가방, 슈트케이스(Suit Case)라고 한다. 

샘소나이트 하드 케리는 내 몸집보다 오버사이즈이다. 뒷바퀴만 2개라서 한 손으로 손잡이를 훌쩍 들어 올려 세계 어디든 돌돌돌 힘차게 끌고 다녔다. 세상을 오래 돌아다닌 피곤한 흔적과 연륜이 묻어나는 가방이 내 직업을 짐작하게 했다. 가방을 가볍게 하면 여행 중 서바이벌이 위험해지고, 가방이 무거우면 이동이 힘들다. 

집을 멀리 떠날 때 짐을 꾸리는 포인트가 있다. 우선 가져가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한다. 아끼는 물건인 동시에 잊어버리기 싫은 물건을 빼면 삶에서 정말 필요한 것이 얼마나 단순한지 알 수 있다. 

첫째, 펜과 노트(낯선 곳에서 새로운 감정이 생기면 불안해서 기록했다. 장소가 바뀌면 생각도 새로워져 재밌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 

둘째, 수면 양말(호텔 에어컨 바람에 발이 시리다. 발이 따뜻하면 잠이 잘 온다.)

셋째, 수분 미스트, 핸드크림, 립밤( 수분 급속 충전 필수 )

넷째, 책 한 권(은근한 조명과 적절한 소음 속에서 읽는 책은 집중이 잘 된다.)

서바이벌에 필요한 건 간단하다. 값비싼 명품과 거창한 장비들이 아니다. 

2008년 1월 1일 03시에 밤 비행 스케줄이 잡혔다. 작년이 떠나가고 올해가 스치는 순간 모든 것이 과거가 되고 새로운 인생을 기대하는 날에 서바이벌 키트(Survival Kit) 준비를 마쳤다. 같은 날, 친구들과의 송년 모임이 홍콩 시내(Central)에서 있었다. 잠시 들렀다가 비행에 갈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름의 치밀한 계획을 짰다. 

시내에서 공항까지는 기차로 1시간인데, 무거운 비행 가방을 들고 복잡한 홍콩 시내를 횡보할 수 없었다. 이번 비행에 친한 한국 승무원 동료와 함께 가니 내 가방을 동료에게 미리 주고 공항 브리핑에서 만나기로 했다. 과연 비행 가방을 맡기고 놀아도 되는 거냐 싶은 찜찜함은 있었지만, 새해맞이도 중요했다.

밤 10시의 홍콩 시내는 축제 분위기였다. 난 12시가 되면 빡빡한 인파를 뚫고 신데렐라가 되어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화려하고 시끄럽고 정신없이 들뜬 새해 분위기를 잠깐 맛본 후, 하이힐을 신고 공항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진땀이 흘렀다. 제시간에 가야 하는데 자꾸 일이 생겨 도착하지 못하는 꿈처럼 몸은 느려지고 시간이 빨리 가는 느낌이다. 

패왕별희 분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린 얼굴, 시커멓게 탄 속으로 겨우 회사에 도착했다. 승무원 동료가 나를 보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내 얼굴을 보고야 내가 맡긴 가방이 생각난 것이다. 동료 집을 향해 전력 질주를 했다. 일의 기쁨과 슬픔을 나란히 겪은 심정이었다. 슈트케이스를 만나는 순간, 서바이벌 키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내 손을 잡았다. 가방과 나 사이에 근육이 연결되어 힘이 생기는 걸 느꼈다. 우선순위를 애매하게 섞어 욕심을 부리면 서바이벌이 위험해진다. 

그동안 어느 나라에 도착해서든 짐을 풀어놓고 며칠을 몇 년처럼 익숙하게 지내왔다. 다시 자루를 여미듯이 챙겨 떠나기를 반복하던 생활이었다. 이제는 이스탄불로 새 삶의 터전을 옮기기 위해 내 삶의 서바이벌 키트를 준비 중이다. 

*서바이벌 키트: 어떤 환경에 비행기가 불시착하더라도 생존을 위한 도구들을 넣어둔 가방이다. 신호 거울, 응급 처치 도구, 정수 정제, 호루라기, 나침반 등이 들어있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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