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읽다 _ 내겐 너무 예쁜, 로맨스 _ 최재훈

영화를 읽다-17회

내겐 너무 예쁜, 로맨스

최재훈, 영화평론가

두근두근, 콩닥콩닥. 세상에 단둘만 남겨진 것처럼 세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상대방에게만 집중하는 시간. 우리 만남은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 같고, 눈밭에서 뒹구는 우리 귀에는 영화 <러브 스토리>의 ‘Snow Frolic’이 들리는 것 같다. 모든 로맨스는 그렇게 자기중심적으로 편집되는 장르다. 하지만 사실 딴 사람 눈에는 그냥 유치한 ‘나 잡아봐라’ 놀이처럼 보인다.

러시아 무르만스크행 기차의 ‘6번 칸’에서 핀란드 유학생 라우라(세이디 하를라)는 러시아 광부 료하(유리 보리소프)를 만난다. 연인 이리나와 함께 하기로 한 여행이 어긋나고 혼자 있는 것도 불안한데, 료하는 거칠고 낯설다. 밤낮을 달리며 여러 역을 경유하며 많은 사람들이 스치듯 지나가고, 그 속에서 서로를 알아가는 라우라와 료하의 마음은 서로를 향해 오르락내리락한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유호 쿠오스마넨(Juho Kuosmanen) 감독의 <6번 칸 Compartment No.6>(2023)의 줄거리와 설정만 앞서 보면 로맨스 영화의 클래식이 된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라이즈>(1996)가 떠오른다. 하지만 쿠오스마넨 감독은 두 사람의 관계를 로맨틱하게 연출하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두 남녀는 서툴고 어설프다. <비포 선라이즈>를 다큐멘터리로 찍으면 <6번 칸>이 될 것 같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화질이 좋지 않은 비디오카메라와 씹혀서 되감아 쓰는 카세트테이프 등의 소품으로 봐서는 <6번 칸>의 시대적 배경은 1990년대 언저리쯤인 것처럼 보인다. 스마트한 전자 세상이 오기 전, 유선 전화와 편지, 직접 만나는 방법 이외에 서로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던 시절이다. 상대에게 닿을 수 있는 방법을 최소화해서 서로에게 쉽게 가 닿을 수 없는 마음을 더 애타게 만든다.

라우라는 어딘가가 비어있는 인물이다. 첫 장면 사람들이 모인 파티 속에서도 라우라는 어색하게 겉돈다. 낯선 이국의 땅에서 연인은 있지만 온전하게 채워지지 않아 외로움을 느낀다. 료하는 얼핏 거칠어 보이지만 사실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할머니 집에서 그는 기차 시간이 늦었지만 할머니를 위해 장작 하나라도 더 만들어 두려고 애쓴다. 그리고 라우라의 반경 속으로 계속 밀고 들어와 그녀를 지켜준다.

쿠오스마넨 감독은 라우라와 료하가 각자의 영향을 받으며 변화하는 과정을 조용히 관찰한다. 무뚝뚝한 남자가 어느 순간 귀여워지고, 건조한 마음을 가진 여자가 다정해지는 순간, 두 사람의 울적하던 표정에선 빛이 난다. 그렇게 마음을 들여다보는 정성스러움 덕분에 두 사람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평범한 남녀의 별것 아닌 이야기가 로맨틱해지는 기적을 관객들도 함께 느낄 수 있다.

라우라가 거리를 좁히는 순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달아나고 ‘암각화’라는 단어를 기억하지도 못하지만 료하는 상대방을 위해 암각화를 보러 갈 작정이 있는 남자다. 하지만 눈보라를 헤쳐 두 사람이 만난 암각화라는 것은 당황스럽다. 대체 어디에 있다는 건지 알 수 없는 바닷가의 어느 바위를 찾아 헤매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영역에 속한 것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온전한 사람들이고, 사랑 앞에서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 사랑스럽다.

으스스해질 것처럼 춥고 쓸쓸한 러시아를 배경으로 우리가 들여다본 것은 라우라의 오랜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러시아를 가득 담았던 캠코더는 도둑맞았지만, 러시아의 마음을 품은 기억은 온전히 남았다. 그렇게 <6번 칸>은 우리 시간에는 기록이 아니라 기억만이 남는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렇게 기억은 카메라가 아니라 심장에 새기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 료하가 남긴 쪽지를 보며 라우라는 마음이 온전히 차올라야만 웃을 수 있는 해맑은 소녀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 내 첫사랑과 닮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그 시절, 그렇게 벅차올랐던 사랑이라는 기억, 그 마음의 기적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