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오후의 그림카페

나의 그림

서지혜, 일러스트레이터·화가

나는 한 번도 내 그림이 마음에 든 적이 없었다. “당연히 마음에 들 수 없는 거 아니야?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어? 그게 원동력이 되는 거지”라고 흔히 말하기도 하지만, 완성에 대한 기준을 너무 높게 잡은 탓인지 만족하지 못했다. 계획을 세우고 이를 완벽히 처리하는 이상적인 사람이 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착각이라는 것을 불과 두 달 전에 깨달았다.

사실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완벽히 이행한 적은 극히 드물었다. 대학교 때는 과제를 발표 당일 수업 시간에 준비하거나 과제 전에 제출할 작업을 3~4일 전에 몰아서 한 적이 많았다. 내가 미룰 수 있는 한 최대로 미루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도 미루는 것에 대비하지 않았던 이유는 미루는 것은 본래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내일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괜찮았다. 그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그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함께 존재했다. 미루고 그린 것은 나라고 생각하는 내가 그린 것이 아니기에 당당할 수 없었다.

그림을 그린 후에는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좋다면 그 이유를 의심했고, 잘 모르겠다는 대답에는 위축이 들었다. 작업을 발표할 때는 거짓말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오히려 더 작아지곤 했다. 그나마 작업을 봐주는 사람들에게 미안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은 항상 힘들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리는 과정의 힘듦이 노동의 가치로 인정받아야 했고, 어렵게 그려진 그림이야말로 좋은 그림이어야 했다.

이제 한계였던 것인지 마감에 다가와서야 작업을 하는 나에게 화가 났다. 서울에서의 개인전을 앞두고 ADHA약을 처방받아 복용했지만 차이는 없었다. 완벽주의자와 미루는 것에 관한 다양한 책을 읽고 유튜브도 봤다. 그렇게 애를 쓴 기간이 6개월을 지나고 있었다. 하도 차도가 없어 추가적인 약을 처방받았고, 그 약으로 인해 식욕부진과 두통, 메슥거림의 부작용으로 일상생활이 힘들어지고 나니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김없이 마감 기한에 맞춰 빠듯하게 작업하고 있었고,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는 자신이 상담해 온 심리상담사에게 내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녀는 나와 너무나 비슷했다. 처음 일에 들어가기에 앞서 눈앞에 이 일이 몇 일짜리라는 판단이 서고, 마감일을 기준으로 정해둔 며칠 전에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미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마감일이 기준이 되면 언젠가 감당 못 할 순간이 다가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정해둔 시간에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하고 애초에 처음 기준 일을 두세 배 늘려 새로 기준점을 잡고 마무리하는 방식을 취했다.

마감일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자신을 비난하며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위기의 순간에 나오는 순발력과 고도의 집중력을 역이용하여 해내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간 풀리지 않았던 답이 한순간에 해소되었다. 타고난 특성이라는 말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고 처음으로 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미루어 그림을 그려온 것이 누구도 아닌 내가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 맑아졌고, 두통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 후로 약을 끊었다.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이제껏 그려낸 모든 것이 나의 노력이라는 사실에 자랑스러웠다.

나는 이제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행복을 느낀다. 생각해 보면 나는 항상 그림을 그릴 때 에스키스(esquisse)를 하지 않고 완성의 이미지가 보이는 대상은 그리지 않았다. 마감 기한의 몰입이 하나의 도구가 되듯이 그림에 대해서도 추상적인 감정을 갖고 작업에 들어가는 것은 예측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나 자신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초등학교 때 본 한 다큐멘터리에서 힘들었던 하루의 끝에 집 안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며 위로받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때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한 작업을 해왔지만, 정작 나를 위로하는 법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이 마음을 깨닫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그림에 대한 주도권을 남에게 넘긴 채 내 삶도 쉽게 흔들렸다. 늘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좋았지만, 이제는 혼자 보내는 시간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캔버스 앞에서는 오롯이 혼자가 된다. 그날 온도가 어땠는지, 어떤 공기가 흐르는지, 앞에 선명히 놓여있는지 저 멀리서 희미하게 다가오는지, 그림 안에 들어가 그와 이야기한다. 끝없이 펼쳐진 캔버스 안에서 오래도록 자유롭게 춤추고 싶다. 가끔 찾아오는 그림을 그릴 때의 기분 좋은 떨림은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내 그림을 사랑한다. 그림 안에는 그리는 사람이 담겨있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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