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_ 당신의 삶이 내게로 올 때 _ 지주연

만남

당신의 삶이 내게로 올 때

지주연, 배우

“누가 짐을 가장 사랑하느냐?” 브리튼의 늙은 왕 리어. 왕국을 나눠주기에 앞서 세 딸에게 자신에 대한 충정과 사랑을 시험한다. 사랑을 말로 증명해야 하는 찰나의 순간, 나는 세 딸 중 어느 딸의 말과 만나게 될까?

희곡이나 소설을 읽으면 항상 다양한 등장인물을 만나게 된다. 어릴 적부터 동화를 읽고 그 인물들을 직접 구연했는데, 일곱 살 아이의 지상 최고 놀잇거리가 정확히 20년 후 내 삶이 되어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연기는 직업을 넘어서 내 인생 자체가 되어가고 있다. 한 작품을 만나게 되면 새로운 생애가 다가온다. 내 삶보다 때로는 등장인물의 삶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고 그 인물로 살아가려 한다. 또, 내가 맡은 인물을 중심으로 그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현실에서도 그렇듯 사람들의 성장 배경과 가치관, 성격이 모두 다르기에 우리는 종종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의 세상에서 상대방을 판단하는 오류를 저지르기도 한다. 연기를 할 때도 텍스트 전체를 분석하고 파악하지만, 점점 내 인물로서 다른 인물을 재단하고 평가하기도 한다. ‘내가 만약 상대방이었다면?’이라는 역지사지가 힘들 때가 있다.

그런데 한 작품에서 극단적인 두 인물을 만나게 되는 천운 같은 일이 생겼다. 바로 가장 완벽하고 위대한 비극이라 일컫는 셰익스피어의 걸작 <리어왕>에서였다. 2021년 예술의 전당에서 <이순재의 리어왕>으로 전석 매진을 기록한 지 1년 반 만에 리어왕이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처음 마주하는 작품처럼 내게는 새로웠다. 그때는 맏딸 ‘고너릴’로 분했다면, 이번에는 막내딸 ‘코딜리아’로 무대에 섰기 때문이다. 코딜리아는 리어왕이 가장 사랑하는 딸이지만, 너무 진실하고 올곧은 성격으로 아버지의 미움을 사 쫓겨난다. 그래도 불변의 사랑으로 끝까지 아버지 옆을 지키는 고결하고 강인한 인물이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여성 인물 중 가장 유명하고 의지적이며 신념적인 캐릭터라 부담되고 책임감도 느꼈다. 그녀는 전체 25장(scene) 중 오직 5장에만 등장하며 100개의 행(line)을 넘지 않는 말을 한다. 진실한 그녀의 언어이기에, 말의 경중을 더욱 고민하다 보니 말수가 평소보다 현저히 줄어들었다. 코딜리아의 진중함에 압도될 때도 있어서 ‘그녀로 되기’ 접근을 보다 신중히 했다.

무엇보다 존경하는 이순재 선배님의 마지막 리어왕에 승선했기에 한 단어를 내뱉기가 아깝고 소중했다. 선배님을 옆에서 뵙고 있으면 연기와 연극, 리어에 대한 사랑의 끝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숭고해진다. 그런 아버지 리어를 옆에서 보고 있으면 코딜리아는 숙연해지고 진지해진다. 그리고 언니들의 가식적인 아첨 뿌려진 말들에 대한 거부반응에 신체가 쭈뼛한다. 또, 아버지 심신을 학대한 언니들에 대한 처절한 분노가 온몸에 전달된다. 코딜리아는 두 언니와 재질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물과 기름처럼 한데 섞일 수 없다.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 아버지를 쫓아낸 언니들을 용서할 수 없는 그녀는 아버지를 구하고 왕국을 되찾기 위해 프랑스군을 이끌고 영국 본토에서 전쟁을 일으킨다.

불과 1년 반 전만 해도 나는 코딜리아가 오만함으로 가득한, 혼자 고귀한 척하는 인물로 느껴졌다. 사실 첫째 딸 고너릴을 할 때, 아버지의 사랑은 모두 독차지하면서 사랑한다는 표현도 할 수 없다는 코딜리아가 답답하고 융통성 없어 보였다. 배역을 진정 사랑할 때부터 그 배역에 몰입할 수 있는데, 나는 고너릴을 한 번도 악역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평면적으로 고너릴은 변질한 사랑으로 리어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고 벼랑 끝으로 내몰아치는 못된 딸이다. 하지만 그 내면을 보면 아버지의 변덕스럽고 독단적인 지배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 여왕이 되려고 야망을 품는, 시대를 앞서간 걸 크러시다. 허수아비 같은 남편도 갈아치우고 내 사랑을 직접 선택하며 “내가 법이다!”라고 세상에 공표하듯 외치는 욕망적인 그녀가 멋있었다. 아버지 리어 순재 앞에서 소리를 질러대며 눈과 눈을 마주 보고 피 튀기듯 폭주하며 폭발하는 경쟁 관계를 연기할 때 묘한 전율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는 부녀지간이 되어 진실한 효심으로 아버지 리어를 옆에서 모신다. 이제는 아버지 머리칼에, 팔뚝에 손을 대기만 해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며, 침묵의 사랑으로 일관했던 자신의 고집에 대한 회한과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속죄의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모든 사랑을 바친다. 말 없는 사랑이지만, 귀가 아닌 눈으로 들어달라는 그녀의 고귀함에 동화된다.

한 작품에서 두 인물을 2년 안에 만나면서 각 인물의 당위성과 세계관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리어왕 안에 세상사 모든 것이 담겨있음을 알게 되었다. 생로병사를 담은 우주적 이치와 희로애락이 깃든 인간적 가치를 진심으로 느낄 수 있었다. 유(有)로 가득 차 화려하지만 어지러운 지금 이 세상에 무(無)가 주는 참된 의미와 사랑으로 우리들의 눈과 마음이 정화된다. 다음에는 어떤 인물이 나에게 고맙게도 와줄지, 그리고 우리는 어떤 귀한 만남을 갖게 될지 설렌다. 내 삶 또한 다양한 인물과 함께 지혜롭게 여물어가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