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만, 화가

사막 한가운데 대략 너비 30m, 깊이 7m 정도 깊게 파인 웅덩이 안에 한 사내가 서 있다. 웅덩이 원지름 밖으로 둘러싼 수십 명의 남자들이 장총을 들고 한 명의 남자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다. 그리고 웅덩이 안에 있던 남자는 자신이 쓰고 있던 모자를 올리고 한 손에 태우고 있던 담배를 검지로 튕기듯 던져버린다.

그렇게 공중에 튕겨 빙빙 돌던 꽁초는 마치 또 다른 수신호인 것처럼 보인다. 그 순간, 이를 에워싸고 있던 수십 명의 남자들은 알 수 없는 방향에서 날라 오는 총탄에 맞아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두 슬로모션으로 쓰러져간다.

이러한 배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잔잔한 북소리와 플루트 음색으로, 이것들의 뒤를 이어서는 오보에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른 관현악기로 연결되어 반복적인 리듬으로 웅장해지고, 장엄하게 연주된다.

이는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 영화의 한 컷으로 영국군과 독일군이 등장하는 것으로 기억된다. 이 장면은 대략 수십 년 전 늦은 어느 가을밤, 꽃무늬 담요를 뒤집어쓰고 토요 명화를 보곤 했던 아홉 살 어린 소년의 가슴에 화살처럼 날아와 단숨에 꽂혀 이내 상흔을 남겼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슈퍼맨이나 울트라맨보다 영화 속 영국 장교의 모습이 슈퍼히어로 그 자체로 인식되었다. 물론 지금은 그 영화의 제목도 배우의 얼굴도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영화 속 배경 음악만은 이후에도 여러 곳에서 흘러나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의 <볼레로 Bolero>이다.

시간이 흘러 그 곡과 다시 조우했던 때는 학창 시절의 어느 여름날이었다. 나는 교복을 벗고 거실로 나와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채널을 돌려보던 중 한 개그맨이 깜깜한 무대 위에서 했던 퍼포먼스를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그는 검은색 쫄쫄이 의상을 입고 <볼레로> 음악을 배경으로 두 다리를 폈다가 오므리면서 매우 우스꽝스러운 무대를 연출했다.

그 음악과는 대조적이었던 퍼포먼스, 그 반전의 묘미가 너무나 절묘해서 나는 한참을 바닥에 엎드려 배를 움켜잡고 울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기억 속 장중했던 <볼레로>는 어느새 사라지고, 그 퍼포먼스는 이보다 더 친근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볼레로>와 나를 다른 의미로 친밀하게 연결해 준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볼레로>는 삶의 일선에서 내 마음을 가다듬고 나 자신을 응원하고자 다짐하는 날이면 늘 생각나는 음악이다. 나는 그럴 때면 어김없이 <볼레로>를 찾아서 듣곤 한다. 매번 익숙하게, 또 새롭게 <볼레로>를 만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음악은 나만의 역전의 수신호이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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