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대상, 축하드립니다.” 

한 해의 시작은 누군가의 세리머니로 끝난다. 연기와 연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최고의 활약을 한 이들에게 왕관을 씌우고, 그들의 올해가 가장 가치 있었다고 말한다. 언젠가부터 이런 연말 시상식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했던 것 같다. 내 한 해의 성취가 보이지 않아 웃을 수 없었던 시간부터 그랬을 것이다. 한 해의 성취를 돌아보는 이들 앞에서 이룬 게 없는 나는 얼른 남은 한 해를 보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다 모든 것이 리셋되고 많은 이의 환호성이 들리는 그 순간, 내게 읊조린다.

“올해도 잘 버텨줘서 고마워.”

그렇게 맞이한 새해 첫날 아침은 의욕이 넘치고, 이때면 꼭 하는 연례행사가 있다. 1년을 함께할 다이어리를 펴고 올해 이뤄보고 싶은 일, 해보고 싶은 일을 하나씩 써 내려간다. 이런 목록을 ‘버킷 리스트’라 부르고는 한다. 근래 사람을 분류하는 MBTI의 관점에서 보자면 J형 인간인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대개의 항목이 작년에도 썼던 것들이다. 올해의 버킷 리스트가 완성될 때쯤에는 나도 안다. 이중 대다수는 내년 이 시간에도 또 쓰고 있을 거라는 걸. 이런 모습에 누군가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럴 거면 굳이 이걸 쓰는 이유가 있냐고. 단언컨대 “있다”라고 말하고 싶다.

카터(모건 프리먼)와 잭(잭 니콜슨)도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일들을 종이에 옮겨 쓰는 시간을 갖는다. 그런데 그들의 버킷 리스트는 조금 비장하다.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일’을 고민 중이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통보받은 병실에서 말이다.

카터는 가정적인 남편이자 성실한 정비사였지만, 가난한 삶을 살았다. 잭은 불같은 성격으로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지만, 자수성가한 백만장자로 풍족한 삶을 살았다.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두 남자는 인생의 끝에 놓여있다는 동질감에 남은 시간을 더 가치 있게, 나를 위해 쓰기 위해 병실을 뛰쳐나간다. 그들은 과연 얼마나 많은 걸 이룰 수 있을까. 그리고 서로 다른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이 발견한 인생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영화 <버킷 리스트>에서 죽음은 삶과의 이별을 뜻하는 동시에 시간의 유한함을 인지하게 하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 덕분에 카터와 잭은 더 과감하게 그들이 정말 원했던 일에 도전하고, 여러 이유로 미뤄왔던 것들을 하나라도 더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움직인다. 서글픈 벼락치기다.

우리도 주인공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죽음이 부유하는 세상에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하루를 보내고는 한다. 기회가 무한할 것만 같은 착각 속에서 많은 걸 내일로 미룰 때도 있다. 그렇게 밀어낸 것 중에는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 더불어 꿈이라는 게 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점점 자취를 감춘다. 카터와 잭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적어도 그들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를 빠르게 써 내려갈 수 있었으니까.

‘버킷 리스트’는 단순한 계획과 목표의 나열이 아니다.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우리가 행복을 찾는 여행 중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음을 기록하는 일지다. 이는 무언가를 이루려고 더 나은 삶을 살아보겠다는 다짐이며, 우리가 무엇을 바랐던 존재인지를 기억하려는 의지다. 막연히 흘려보내는 시간 중 일부를 잡아서 나를 위해 써보겠다는 개척자의 발버둥일 수도 있다. 설령, 올해 이루지 못할 것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생존을 넘어 ‘꿈꾸는 존재임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되새긴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2024년이 시작되었고, 이 새로운 한 해도 12월 31일이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올해가 죽기 전에 이루고 싶거나 미뤄왔던 일을 하나씩 기록해 보자. 조금 늦은 것 같다면, 다가올 음력 1월 1일도 괜찮다. 나이에 상관없이, 모든 내일은 무결한 상태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비어있는 시간 중 나를 위한 것은 얼마나 될까. 올해는 우리만을 위한 것들로 더 많이 채울 수 있는 행복한 한 해가 되기를. 올해의 마지막에는 ‘정말 즐거웠다’고 말하며 한 해를 미련 없이 보내줄 수 있기를.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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