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를 읽다 _ 참을 수 없는 책임의 가벼움 _ 강해인 영화평론가

이번 이닝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사회인 야구가 있는 날이면, 새로운 이닝의 마운드에 오르면서 이렇게 내뱉고는 한다. 반드시 막아 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새로운 싸움을 앞두고 마음을 다잡는 출사표 같은 말이다. 사실, 속마음은 이렇다.

‘이번 이닝까지는 강판시키지 마세요.’

공교롭게도 이런 비장한 말을 한 뒤에는 꼭 문제가 생기고 아웃 카운트를 남겨 둔 채 마운드에서 내려온다. 무책임한 투수가 되어버린 거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뜯어보면 재밌다. 꾸짖을 ‘책(責)’과 맡길 ‘임(任)’으로 이뤄져 있다. ‘꾸짖음을 맡긴다?’ 왠지 혼나는 것 같고, 누군가에게 빚을 진 것만 같다. 일상에서 통용되는 의미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나 의무’인데, 생각해 보면 이 단어를 남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마운드에서 잘 던지는 게 당연한 게 아니고, 공 하나를 더 던지기 위해 가볍게 뱉기에는 너무 묵직한 말이다. 그리고 최근 한 편의 영화에서 이 단어의 무게를 더 실감할 수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전세가 기운 정유재란(丁酉再亂). 승리를 앞에 둔 조선과 명의 관리들의 눈은 이미 전쟁 후를 향하고 있었다. 승패가 결정 난 전쟁에 더는 병사들을 희생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조선에 남아있는 왜군과 전투를 하려는 의지도 없다. 하지만 이순신(김윤석)의 생각은 다르다. 한 척의 배라도 더 침몰시켜 정유재란 이후의 화를 없애고자 한다. 명나라 장군 진린(정재영)은 이순신이 아들을 잃은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전쟁을 하려 한다며 비판하지만, 이순신의 결의는 변함이 없다. 그는 조선의 장군으로서, 그리고 전장에서 동료를 먼저 떠나보내고 살아남은 자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량 앞바다로 향한다.

<노량: 죽음의 바다>(이하 <노량>)를 끝으로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이 마무리되었다. 지난 10년은 김한민 감독과 이순신의 집념을 함께 볼 수 있던 시간이었다. 김 감독은 위인을 향한 애정을 이미지로 승화시켰고, 덕분에 우리는 위기 앞에서도 굳건했던 이순신의 결의와 신묘한 병법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감독은 위인을 스크린에 소환했기에 가져야 했던 소임을 다했다. 유독, <노량>에서의 슬로우 모션이 튀어 보였는데, 김한민 감독이 이순신과 함께하는 시간을 더 붙잡아 두려는 것만 같았다.

이번 겨울 극장가의 흥행을 주도하는 게 장군들의 이야기라는 건 흥미롭다. 12·12 군사 반란과 관련된 장군들의 이야기를 담은 <서울의 봄>과 <노량>이 무서운 기세로 관객을 동원했다. 이 두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었던 두 장군의 책임감이었다. 정치군인에게 저항하고 나라를 지키는 군인의 본분을 다했던 이태신(정우성)과 나라가 자신을 외면하고 주변은 승리에 도취해 위험을 피하려 함에도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나간 이순신. 역사가 스포일러임에도 두 작품에 대중이 반응한 것은 두 인물이 보여준 비범한 책임감을 향한 존경의 마음이 반영된 게 아닐까. 혹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이들과 사회를 향한 불만이 투영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책임’이라는 걸 말하는 게 무안한 시대다. 직장에서든 사회에서든 권리와 명성을 누림에도 주어진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무책임한 자들이 많다. 책임을 지지 않아서 잘 사는 이들이 많은 걸 목격하는데 ‘책임감’을 가지라는 건 모순적이지 않은가. 이와 반대로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없는데 책임만 강요하는 조직도 있다. 권리 없는 의무는 폭력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책임감을 가지면 손해’라는 인식이 생기고, 책임을 다하려는 행동은 오히려 미련하고 답답해 보일 지경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책임을 다하자는 말이 너무도 무책임해 보여 씁쓸해진다. 맡은 역할을 다하는 이들이 더 조명받고, 박수받기를 바랄 수밖에. 나 역시 이순신 장군만큼의 책임감을 갖는 건 힘들겠지만, 뱉은 말에는 책임지는 사람이고 싶다. 특히, 내게 했던 말에는 더. 그러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으려나.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시즌에는 내 이닝을 책임, 아니 잘 막을 수 있는 사회인 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